약속 둘

 무려 두달 전 조카의 생일 선물로 공연을 보여주기로 해놓구선...약속은 계속 미뤄졌다.
보통 조숙하지 않은 조카 왈,  "선물은 무슨... 난 이모가 나를 보러 와주기만 해도 고마워."  이런다.
걔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한번씩 이렇게 고지식한 말투로 나를 부끄럽게 만들곤 했다. 그러나 공연 선물은커녕, 몇달 동안 얼굴도 들이밀지 못했다.
"미안해. 이모가 바빠서, 이번 주는 못 갈 것 같아."

매번 똑같은 말로 약속을 미루곤 했다. 
더이상 게으름으로 초등학생 조카와의 약속을 미뤘다간 양심의 가책으로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저께 일요일은 눈을 뜨자마자, "이모 간다! 지금 출발!" 이라고 문자를 보내곤 부스스한 얼굴만 씻고 일산으로 달렸다. 조카들은 집 앞에 있는 학교운동장에서 놀다가 내게서 문자를 받고는 집에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와 형부는 내가 온다니 시장을 보러 가고.

그러나 이게 뭔 꼴인가. 가긴 갔는데, 몇달만에 조카들을 만났는데 머리가 너무 아파오기 시작한다. 아이들을 보자마자 더이상 머리를 들고 있을 수가 없어서 드러누웠다. 며칠동안 잠을 통 자지 못해, 소화불량이 계속 된 탓.
컨디션이 좋질 못해 조카들이랑 놀아줄 수가 없었다. 겨우 한번 만나도, 이모 노릇 제대로 못하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언니와 형부가 돌아와서 형부가 준 배즙 때문인지 원기를 회복. 뒷골이 당기던 게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식사 시간에 전날 본 공연 얘기가 나왔다.

언니네 가족들이 전날 극단 뛰다의 '노래하듯이 햄릿'을 본 후였다. 

조카 둘, 언니, 형부가 돌아가면서 내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내가 한 일이라곤, 연극을 추천했던 것뿐.

공연을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제대로 지킨 것도 아니고, 티켓을 내가 끊어준 것도 아니고, 그냥 오로지 추천만 했을뿐이다. 내가 기여한 역할이란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좋은 공연 덕에 모든 것이 만회가 됐다. 배우친구를 둔 덕분에 내가 고맙다는 인사를 받게 됐다. 

"어떤 직업에 열정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내가 하는 일에 그렇게 열정을 바칠 수 있을까? 부럽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도 들고, 기분이 좋았다." 

공연을 본 후 형부의 소감이다.
어느 연극이든 그렇겠지만, 특히 뛰다의 공연은 배우들의 열정이 눈에 띈다. 식사를 하면서 배우들이 연습을 얼마나 하는지, 무대나 소품들이 어떻게 준비되는지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난 친구에게서 들은 얘기를 전해주었다. 인형들과 혼연일체가 된 광대들의 연기에, 언니와 형부는 퍽이나 감동을 받은 모양이었다. 

며칠 전, 나 또한 '노래하듯이 햄릿'을 보며 다시 한번 감탄했었다. 지난해 야외공연에 이어 올해 또 변화한 공연을 보니 새로운 것들이 많이 다가왔다. 
  
공연 후, 무대에서 봤던 친구가 술자리로 건너왔다. 
야..얼마만이냐. 
이런 말이 이젠 인사가 된 지 꽤 오래된 듯 하다. 
그래, 얼마만이냐. 오랜만이다.칭구야.

"너, 우리집에 한번 와서 요리해준다며?"

그것도 벌써 어언 몇 달 전의 약속이던가. 
"그래. 공연 끝나면 놀러 갈게."
이렇게 시간이 지난다. 곧 약속은 지킬 예정이다.

나이 서른에 우린.... 그런 가사가 머리속에 맴도는 요즘이다. 
여전히 꿈을 꾸며 살아가는 친구가 있어서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나 또한 꿈을 꾼다. 여전히.  

가슴 속에 불씨가 꺼지지 않았다.
후후훅~ 
꺼지지 않은 새빨간 불이야, 불이야~
 

by 오리올 | 2008/11/05 01:39 | 그날 그때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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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c씨 at 2008/11/05 12:43
뛰다 공연은 연출력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배우들이 보여서 좋아요.
연기만 열심히 하는게 아니라.. 연극 인생을 즐기는 모습이 보인달까..
그 열정, 부럽다고 했던 선생님이 생각나네요..
Commented by 오리올 at 2008/11/05 18:07
연극이 그렇더군요. 배우들의 열정이 없다면 연극은 없겠죠.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겠지만, 연극은 관객에게 배우의 소리와 몸짓이 직접적으로 전해지니까. 요즘은 상투적인 표현들이 많이 떠올라요.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나는 어떤 캐릭터의, 어떤 연기를 하고 살고 있나.
내 가슴 속에 열정이 있는가, 같은 생각들.
Commented at 2008/11/21 20:2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오리올 at 2008/11/24 04:48
요즘 관심이 재활용에 가 있어요. 그렇게 보니까 최근에 한 분을 만났는데 열쇠고리를 천으로 만들었는데 참 예뻤어요. 저 분도 재활용카페에 들어오면 좋을텐데, 그런 생각을 했더랬죠. 얘기를 찬찬히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말을 못 꺼냈는데, 다시 만나면 꼭 말을 건네보려구요.ㅎ
Commented by 각설이 at 2008/11/24 22:44
호박요리 맛있었습니다.
소세지도요.
Commented by 오리올 at 2008/11/26 01:06
아이구 각설이님, 깜딱 놀랐어요.ㅋ 가끔 술안주로 괜찮겠지요?
Commented by 각설이 at 2008/11/27 11:11
생협에서 호박이랑 계란을 사서 부치면 고급술안주가 될 것 같아요~
Commented at 2008/12/0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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